솔직히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조선 왕실 공주면 적어도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살았겠거니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해공주의 삶을 파고들수록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머니는 출산 직후 사망,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남편은 능지처참. 27살에 이미 혈육을 전부 잃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후궁의 딸에서 세자빈의 딸로, 뒤바뀐 운명
경해공주의 어머니 권씨는 원래 세자 문종의 후궁이었습니다. 여기서 후궁(後宮)이란 왕이나 세자의 정실 부인이 아닌 측실을 뜻하는데, 후궁의 딸은 공주가 아니라 옹주(翁主)로 불렸습니다. 쉽게 말해 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딸만 공주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경해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공주가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세종이 이 상황을 뒤집습니다. 당시 문종의 세자빈 자리는 공석이었습니다.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는 압승술이라는 주술에 집착했다는 이유로, 두 번째 순빈 봉씨는 동성 스캔들로 각각 폐위되었죠. 세 번 연속 세자빈을 간택하는 것도 민망한 상황에서 세종의 눈에 권씨가 들어온 것입니다. 딸을 이미 낳았으니 아들을 낳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 것이죠. 그렇게 권씨는 후궁에서 세자빈으로 격상됩니다. 경해공주의 탄생이 어머니의 신분을 통째로 바꿔놓은 셈입니다.
이 과정이 제 눈에는 굉장히 낯설게 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실 간택이라 하면 대단히 엄격한 절차를 떠올리는데, 실제로는 왕의 판단 하나로 이 모든 절차가 생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간택(揀擇)이란 왕실에서 후보자를 여러 차례 심사해 배우자를 고르는 공식 제도입니다. 그런데 세종은 이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 결정을 내려버렸습니다.
1441년, 경해공주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권씨는 드디어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훗날 단종이 되는 이홍위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권씨는 산후병으로 출산 직후 사망했고, 경해공주는 한창 어머니 손길이 필요한 나이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여섯 살 터울의 갓난 동생과 함께였습니다.
이후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자랐습니다. 단종은 나중에 어린 나이로 왕이 된 뒤에도 누나인 경해공주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부모도 없고 궁궐에 혼자 남겨진 어린 왕에게 누나의 집은 가장 편한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어린 시절 결속은 성인이 돼도 끊기지 않는 법인데, 경해공주와 단종 남매는 그 결속이 비극을 함께 견디는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경해공주는 1450년 열여섯 살에 정종이라는 인물과 혼인했습니다. 해주 정씨 가문은 두 번이나 왕실과 사돈을 맺은 명문가였고,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이 함께 고르고 고른 상대였습니다. 그러나 혼인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세종이 세상을 떠났고, 이어 문종이 즉위했다가 불과 2년 만에 또 사망했습니다. 1452년, 경해공주 나이 열여덟에 열두 살짜리 단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계유정난 이후 무너진 일상, 유배지의 삶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킵니다. 계유정난이란 수양대군이 당시 어린 국왕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를 말합니다. 그날 밤 수양대군의 군사는 단종이 머물고 있던 경해공주의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아버지 문종이 사랑을 담아 북촌 최고 부지에 지어준 신혼집이 비극의 무대가 된 것입니다.
경해공주 부부와 단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명패를 요구했는데, 명패(命牌)란 왕이 신하들을 소집할 때 쓰는 패로 사실상 왕의 권한을 상징했습니다. 단종은 결국 명패를 내줬고, 수양대군은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제거합니다.
2년 뒤인 1455년, 경해공주에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옵니다. 남편 정종이 갑자기 유배를 가게 된 것입니다. 정종이 수양대군에게 반대하던 금성대군과 친분이 있었고, 단종의 매형이라는 위치 자체가 정치적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세조 측이 선제적으로 조치를 취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날 단종도 왕위를 세조에게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경해공주가 취한 행동이 제 눈에는 놀라웠습니다. 그녀는 아프다는 명목으로 세조를 압박했습니다. 단종의 누나이자 왕의 조카가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이 퍼지면 민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입니다. 세조는 결국 약과 음식을 보내고 정종을 한양으로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경해공주는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왕에게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경해공주는 이런 방식으로 세조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정종은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경해공주는 남편을 따라 김포 통진으로, 이후 사육신 사건 이후에는 전라도 광주까지 함께 내려갔습니다. 사육신(死六臣)이란 단종 복위를 위해 세조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를 가리킵니다. 이 사건 이후 세조는 관련 인사들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했고, 정종의 재산도 몰수됩니다.
광주 유배지에서 경해공주가 마주한 현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재산 전액 몰수, 시중드는 노비 대부분 추방
- 담장을 높게 두르고 우물을 집 안에 만들어 외출 차단
- 음식은 열흘에 한 번만 반입 허용
- 바깥문에 자물쇠를 채워 사실상 감금 상태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됐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경해공주 나이 스물셋이었습니다. 어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하나뿐인 동생까지 세조의 손에 잃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461년, 정종은 승려들과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됩니다. 이미 오랜 유배 생활로 지쳐 있던 정종은 고문 중에 “충신으로서 죄를 받았으니 아프다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정종은 능지처참형을 받습니다. 능지처참(陵遲處斬)이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형으로, 조선 시대 가장 혹독한 형벌이었습니다. 이때 경해공주는 임신 중이었고, 세 살짜리 아들도 있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경해공주는 이후 세조의 명으로 한양으로 불려 올라왔고, 세조가 집과 노비를 돌려줬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아이들은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가 궁에서 키웠습니다. 경해공주는 딸을 출산한 이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었습니다. 비구니란 여성 출가자를 뜻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세 살, 한 살짜리 아이를 남겨두고 절로 들어간 선택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사람이 극한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건 자식이 있을 때인데, 그 경해공주가 아이들을 두고 출가를 택했다는 것은 그만큼 궁궐에서의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웠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원수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 자체가 죽는 것보다 힘들었을 것입니다.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났고, 경해공주도 얼마 뒤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무덤 옆에는 사지가 찢겨 묻을 시신도 없던 남편 정종의 가묘(假墓)가 세워졌습니다. 가묘란 시신 없이 상징적으로 만든 무덤을 가리킵니다. 그녀의 아들 정미수는 훗날 성종 대에 관직에 올라 순탄한 길을 걸었다고 전해집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보통 세조의 집권 과정으로만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실제로 어떤 삶들이 바뀌었는지를 경해공주를 통해 들여다보면 역사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권력 싸움의 부산물이 된 셈이니까요. 조선 왕실사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경해공주와 단종 남매의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단종의 비극이 얼마나 넓게 퍼진 파장이었는지, 그때서야 실감이 납니다.
참고: https://youtu.be/0GuJ7eXh1kk